조선 15대 임금. 선조는 왕비 의인왕후에게 후사가 없어 후궁이었던 공빈김씨의 소생
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말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생
산해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단초가 되엇다. 결국 선조는 승하 직전 당시 적자 영창
대군이 2살밖에 안되어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게 된다. 이것이 뒤에 인조반정의 싹
이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1592) 이후 전후 복구 사업에 전념했던 광해군은 창덕궁 등 궁궐을 중수하고
대동법도 실시했으며, 특히 그의 북방외교 정책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이
용한 치적이었다.
그러나 안으로는 형이었던 임해군과 이복 영창대군을 유배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서
궁에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의 싹을 키우고 말았다. 특히 영창대군을 교동에
서 살해할 때, 방안에 가두고 불을 때어 질식해 죽게 함에 이르러서는 실정이 이미 정
도를 넘어선 뒤라고 할 수 있다.
1623년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의 유래를 낳기도 했던 능양군(
인조)을 포함한 반정군은 광해군을 강화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로부터 능양군을 왕위
에 오르게 함으로써 반정을 성공한다.
하지만 광해군은 제주까지 유배지가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67세의 천수를 다했다. 그것
은 아마도 반정세력이 광해군을 살해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부인 유씨도
역시 강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