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26일 오전 12시 30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조용히 밀려왔다 사라지는 자동차바퀴소리와
살금거리는 바람의 체취.
그리고 뚜벅이는 내 발자국 소리뿐. 그외엔 모두가 침묵이다.
벌써 1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20년을 넘게 살아왔던 안암동을 떠나 이곳 낯선 행당으로 온것이
작년 여름이었으니 추운 날씨에 저절로 옷깃을 여미는 겨울을
벌써 2번째 맞는것이다. 그런데도 난 참 매정했다.
아직도 난 이동네 사람같지가 않다. 여전히 낯설고.
미덥지가 않다. 아침저녁 오가며 만난 얼굴들이 제법 익숙할법한데도
사람들과의 의례적인 목례조차 하지않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흔히 말하는 '아파트촌의 삭막함'과는 달리 모두가 이웃사촌처럼
친해 보이는 이곳 '대림촌' 으로서는 이런 개인적 행동들은 참으로
보기드문 일인 것이다. 관심도. 애정도 없다. 나는 여전히
우리집, 우리동네 하면 어릴적 뛰놀던 개운사 앞마당과
아직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던 고대앞 전봇대가 생각이 난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뒤늦은 일과를 마치고 침묵으로 둘러싸인 아파트 단지를 걷는다.
조금 숨이 차다.오늘부턴 날씨가 추워진다고 했던가..
어제와는 사뭇 다른 냉기가 느껴진다.
맨끝동. 119동은 아직 절반은 더올라가야 한다. 젠장. 꽤 춥다.
추우니까 싸늘한 침묵이 한층 돋보인다.
문득 하늘이 궁금하다.
갑자기 추워진 싸늘함은 오히려 도시의 야경을 훌륭히 장식한다.
아름답고 평화롭다. 아무도 토를 달지 않고
오직 청명한 어둠속에서 별과 함께 반짝이는 불빛들이 보인다.
이동네도 꽤 쓸만한 구석이 있다. 앞으로 종종 감상해 줄 느긋한 용의도 생긴다.
저들은 모두 지금 잠들어 있을까..
내가 약속한 25세는 이제 꼭 1년이 남았다.
아쉽게도 스스로가 책정해 놓은 나이의 의미는 갈수록 무의미해 진다.
시간이 인생의 책장을 한장씩 넘기면서 나는 어느새 길들여져 가는것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믿고싶다.
늙고싶지 않다. 나는 다만. 배워나가고 싶고. 성숙하고 싶다.
이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다들 자신의 현실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몸이 편하다면 마음이 혹은 그 반대로 힘겨워 하며 도대체가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너무나 드물다. 나역시 한동안 몸살기로 고생했었고. 입술엔 바이러스 침투로 눈에는 결막염으로 영 신통치 않는 건강으로 불편했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 참 많이 약해졌었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물었다. 무엇이 행복한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꽤 오랜시간을 보냈다.
결국 난 현재의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궁극적인 결론 앞에 나는 매순간 현실의 일상속에서 수도없이
갈등하고. 저울질 할거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저 아무생각없이 정진하기엔 지나온 시간들이 꽤 많다.
그러기에 더더욱 절실하다. 어쩌면 이 시기후에 몰려들 결과들에
나는 영영 인생의 뒤편에 조용히 물러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잘 살아나가길 바란다.
친구들이 저마다의 삶을 열심히 영위하는 모습들은 나를 자랑스럽게 한다.
언젠가 이 친구들이 중년과 부모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물러설때
나는 그들이 삶을 향유하길 바란다. 진정 삶을 즐길수 있는 사람들이길 바란다.
시퍼런 젊음을 과감히 투자할줄 아는 사람이길 바란다.
그리고 나또한. 그들의 자랑스런 친구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싶다.
당장의 내 편안한 일상따위와 맞바꿀수 없지않은가.
나의 삶은 특별하고. 모두의 삶은 더욱 특별하다.
인간은 어자피 하나의 유기체일 뿐이고. 그 정신또한 언젠가는 소진되어버릴
유한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더욱 특별하다. 오직 그들일 뿐이므로.
나는 이 특별한 세상에. 특별한 삶으로 태어나 벌써 24년을 살아왔다.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리고 고개를 젖혀 머리위를 곧추보았다.
북두칠성이 보인다. 6개밖에 보이지 않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