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 으례 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안부를 물은 후
그녀는 내게 말했다.
바빠서 식은 좀 후에 올릴 거지만
다음 주 정도에 혼인신고는 할 거라고.
결혼한다는 여자아이들의 전화야 이미 익히 받아왔던 터지만
겨울이란 계절적인 탓인지, 아님 요즘 좀 센티해진 내 감성 탓인지
이상하게 깊은 상실감이 느껴져 왔다.
2.
사귀던 여자친구와 이별하는 건 1990년대에 이미 충분하리만치 해봤다.
이 상실감은 그런 이별과 같은 감정이 아니다.
1990년대 후반의 이별은 영원하지 못했다.
때로는 술에 진탕 취해 잘 지내니, 하며 전화를 걸 수도 있었고,
때로는 끊어진 성수대교가 다시 이어지듯 재회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
이것은 다시는 연락할 수 없다는, 영원한 이별을 의미한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내 삶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3.
아마도 내 욕심이고, 이기심이리라.
아직 결혼을 하고 싶다는 욕망보단
해야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훨씬 큰 상황에서
삶을 함께 향유할 동지가 사라진다는 것이 내 상실감의 본질이리라.
그리고 Eric Segal.
중학생 시절 눈물 흘리며 읽었던 Eric Segal의 Doctors가 문득 떠오른다.
이제 와서는
그간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결혼할 나이에 사랑하고 있기에 결혼하는 일은 없게 하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두렵다.
-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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