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문화일기 99 함께 보낸 날들 (1998-09-06)

작성자  
   achor ( Hit: 1014 Vote: 4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문화일기


『칼사사 게시판』 30271번
 제  목:(아처) 문화일기 99 함께 보낸 날들                           
 올린이:achor   (권아처  )    98/09/06 04:35    읽음: 22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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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보낸 날들, 박일문, 1997, 깊은샘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던가.
가장 맛있는 음식을 가장 마지막에 먹는 이.

내가 그랬다.
오늘을 위해 몇 달동안이나 이 책을 핥고만 있었다.

그리고 99.
드디어 때가 왔다!


<광기>

  -전 죽을 거예요. 죽어 버리고 말 거예요.

  당신이 후박나무 가지를 잡고 흐느끼던
  사원 앞의 시퍼런 호수도
  당신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다던
  사원 뒤의 느티나무 숲도
  그대로 있는데,
  지금 우리는
  삶과 죽음의 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그 해 여름
  바람에 푸른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출가사문이었습니다.
  당신은 속옷과 양말, 책 몇 권을 가방에 넣고
  산사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왜 하필이면 출가를......?
 
  그렇게 묻는 당신의 눈은 슬펐습니다.
  이틀 후 당신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 당신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어요.
   제가 당신을 책임지겠어요.
  
  후박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없습니다.
  당신은 고개를 내게로 돌리며 다시 말합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예요.
  
  내가 출가를 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당신은 내 말을 가로 막으며,

  -당신이 운동을 하든 지옥엘 가든
   이제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로 인해서 고통을 살 필요는 없다고.
  눈만 돌리면 행복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고.
  그러면 당신은 단호하게, 결정적으로,
  확신에 찬 눈으로 말합니다.

  -안돼요. 이제부터는 고통도, 당신도
   모두 제 꺼예요.

  나는 당신의 뜨거운 피를 진정시키고
  당신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고
  산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나도 내 광기를.
   출가사문이 되지 않고는
   나도 내 삶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죽음이 내 광기를 잠재울 줄이야.












<젊음, 그 삶의 유배지에 대한 기록>

1979년부터 1993년까지 15년간 박일문의 기록.

이 땅의 자유와 민주를 위해 투쟁한 과거.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잃어버린 이데올로그의 현재.

그의 시에는 쓸쓸한 시대에 대한 아픔이 묻어난다.

저 압구정의 배신자들이
자신의 영위를 위해 검은 마음을 품었을 때
자신을 버리고 투쟁했던 그들.

그러나 이렇게 되어버린 현실.
그게 민주주의.

삶의 방식을 욕하진 않으련다.
삶의 태도를 논하진 않으련다.

다만 그렇게 많은 것을 '함께보낸' 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사라져가는 그 쓸쓸함.
난 단지 그게 슬플 뿐이다.

정리할 필요는 없겠지.
'함께보낸 날들'을 추억에 고이 묻곤
새로움을 향해 지난 과거를 정리할 필요는 없겠지.

'함께보낸 날들'이 아름다웠으니
그것으로 됐지.

또다른 즐거움이 있을 테고,
추억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이별도 사랑인가>

  이별은 아름다운가?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입을 다물겠습니다.
  이별하는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노래한
  어느 시인이 있습니다.
  -헤어져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노래한 시인도 있습니다.
  -사무치게 사랑하였기에
   이별을 하였노라

  그러나 나는 이렇게 노래하겠습니다.
  이별은 아름다운가?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이별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답하겠습니다.
  이별을 아름답다고 노래한 시인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시를 쓰기위한 말장난이라고
  나는 노래할 것입니다.

  진실로 이별은 슬픈 것이라고
  진실로 이별은 뼈를 깎는 아픔이라고
  진실로 진실로 이별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멈추는
  천지개벽 같은 아픔이라고
  노래하겠습니다.

  이별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空日陸森 Fucking 우레 건아처


본문 내용은 9,67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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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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