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사사 게시판』 38855번
제 목:(아처) 문화일기 172 臥虎藏龍
올린이:achor (권아처 ) 02/04/30 19:41 읽음: 0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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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臥虎藏龍, 李安, Columbia, 2000, 영화, 미국
와호장룡을 보고 난 직후의 느낌은 허무감이었다.
용이 자살을 하고 난 후 나는 소원에 관한 무언가가 새롭게 펼쳐
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영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90년대 후반의 홍콩영화와는 차이가 있는 허
무감이었다. (물론 이안 감독은 대만출신이고, 와호장룡은 미국영
화이다) 내가 동사서독 등의 영화로부터 느꼈던 허무감은 영화의
철학적인 여운에 기초한 허무감이었고, 중경삼림 등의 영화로부터
느꼈던 허무감은 일상의 공허감에 기초한 허무감이었다. 그러나 와
호장룡의 허무감은 스토리의 미완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더 전개되
어 보다 완벽한 결말을 기대했던 나의 식상한 영화 편견에서 비롯
된 그런 허무감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기시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허무감은 와호장룡에 대한 실망으
로 작용하고 말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기시감은 와호장룡의
원작이 다름 아닌 王度虐의 鐵騎銀甁이라는 데 있었다. 우리나라에
서는 고려원에서 1992년에 청강만리(淸江萬里)라는 제목으로 출판
이 되었었는데, 와호장룡은 이 청강만리의 1부, 철기은병의 와호장
룡편이었고, 나는 1999년에 15권이나 되는 이 대하소설을 읽어봤었
던 게다. (문화일기 137 청강만리 참조 --;)
사실 대충은 내용이 생각나면서도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아 과거
의 기록들을 조금 살펴보았더니 나는 청강만리를 페미니즘 무협지
의 시초로 기록해 두고 있었다.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리는, 정의로
운 남성 영웅의 기록이 대개의 무협지인 반면 청강만리는 악한 여
성 영웅, 옥교룡(용)의 사랑이 장구한 이야기의 주된 테마였다.
그러나 친구들도, 저명한 비평가들도, 모두가 극찬했던 이 영화
는 내게 별 감흥도, 별 느낌도 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영화는
따분했고, 어두웠으며, 부족했고, 아쉬웠다.
원작의 일부만을 차용하였긴 했지만 와호장룡은 철기은병과 같이
연애담이다. 중국무협지는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고 하는데 그 하
나가 영웅담을 주로 담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연애담을 담는 것이
라고 한다. 이 철기은병의 작가 왕도려는 후자의 대표주자로 와호
장룡은 네 인물의 사랑이야기였다.
이 사랑이야기는 서로 대비되면서도 지극히 동양적이었다. 무바
이와 수련의 사랑은 오랫동안 서로의 벽을 지켜나가는 애틋하고 은
은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반면 용과 호의 사랑은 사막에서 한 순간
에 맺어진 강렬한 사랑이다. 무바이와 수련의 사랑이 녹차와 같다
면 용과 호의 사랑은 콜라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랑의 방식은 모두가 남녀, 동양 전통의 음
양사상과 맞물려 있었다. 과거 서구 영화들 속에서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는 대체로 삼각관계의 구도 속에서 갈등하고, 희노애락을 겪
지만 와호장룡의 사랑의 적은 다른 이가 아니라 의리나 정의, 시간
과 같은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나는 이것이 어쩌면 와호장룡의 사
랑이야기가 서구인들에게 더욱 새로우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설 수
있었던 부분이었고, 또 우리에게는 친근하게 느껴졌던 부분이 아닐
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랑을 실감하기에 너무나도 퇴폐했거나 기
존의 서구 영화 구도에 세뇌되어 버렸던지 그것은 영화나 소설에서
반드시 존재해야할 갈등의 미약함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강호를 초탈하고자 했던 절정의 고수 리무바이가 아직은 어
린 아이에 불과한 용의 장난 어린 도둑질로부터 강호로 되돌아 와
결국은 허무하게 죽고 마는 모습은 서구 영화에서 보아왔던 맞수간
의 장엄한 대결이 아니었다는 데에서 아쉬움으로 남았다. 물론 이
것이 동양의 모순과 역설의 철학을 담으려는 감독의 의지였다 하더
라도 말이다.
와호장룡은 대체적으로 스토리보다는 아름다운 풍경과 멋지게 표
현된 액션장면, 그리고 정교한 음악으로 더 호평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평가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들 또한 중요
한 요소겠지만 만약 내가 와호장룡의 감독, 혹은 극본을 맡았다면
나는 스토리의 극적인 부분을 더욱 신경 썼을 것이다.
이것이 자극적인 것에 너무나도 노출되어 버린 시대의 병폐라 하
더라도 영화나 소설은 일상의 평범하고 의미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특별하고 독특한 경험을 그 대상으로, 그것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의 감동이든 철학이든, 나는 그
것을 더욱 내재해 두고 싶다. 물론 와호장룡도 감독 자신의 철학은
충분히 내재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보편적이지 못했고, 또 작가 개
인만의 것으로 느껴졌다.
물론 어떠한 비난에도 그 장엄한 사막의 풍경은 아직 내게도 멋
있는 장관으로 남아있다. 또한 장지이는 예뻤다. 다만 키가 좀 컸
다면 좋았을 것을... --;
020430 19:47 두 번 이상 보고 싶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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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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