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가 오랜만에 말을 걸어 1주일 뒤 결혼한다고 했을 때
한편으론 놀랍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그럴 만도 하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는 한에서 그는
자신의 몸값을 제대로 받아내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으니.
그의 능력은 최고가 아닐 지 모르겠지만
직면한 여러 상황 속에서 그가 선택해 내는 건 항상 최고였다.
2004년인 지금,
아마도 28살은 여성이 결혼하기에 적절한 나이인가 보다.
심지어 그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눈 오늘,
이미 결혼을 했다고 이야기를 했더라도 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가
나 아닌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것을 이미 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
그의 결혼 소식을 처음 들을 때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실감이라 할까, 아쉬움이라 할까.
그런 느낌들이 커져만 간다.
비록 시간이 많이 지난 옛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때는 결혼을 하고자 했던 그이기에
나는 마치 사랑하고 있는 애인이 갑작스레 다른 사람과 결혼해 버리는 경우와 비슷한,
그런 느낌을 받고 있나 보다.
3.
내 20대 초반의 사랑에 짙은 영향력을 갖고 있는 그의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결론은 아쉬움이었다.
그와 사랑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고,
그것이 그에 대한 아쉬움이 되어 나로 하여금 그를 그리워하게 만든 것일 뿐이리라.
만약 그와 사랑했던 기간이 더 길어졌더라면
아마도 이런저런 안 좋은 기억 또한 그와 연결되어
그를 지금처럼 대단하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으리라.
영원한 사랑은
오직 사랑의 정점에 있을 때 외부의 힘에 의해 사랑이 깨어져
다시 돌이킬 수 없을 때만이 가능한 것처럼
그에 대한 감정은 역시 아쉬움일 뿐이라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다.
4.
옛 생각을 하며
작년, 이사온 후 아직까지도 정리해 놓지 못한 짐들 속에서 다이어리를 찾아냈다.
과거엔 세세콜콜한 이야기까지 적어놓곤 했었는데...
술 마시고 뻗기를 반복하던 그 무렵
다이어리를 많이 잃어버려 지금은 1999년 겨울의 기록부터 남겨져 있지만
그래도 보다 보니 새삼 옛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기는 한다.
언제쯤이었을까. 1999년 정도였던가?
그와 난 서로 연락이 끊기더라도
2004년 5월 11일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만나자는,
다소 유치하면서도 드라마 같은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5월 11일,
나는 그곳에 나가지 않았고,
그 또한 나오지 않았으리라.
약속을 잊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 또한 약속을 잊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2004년은 약속을 했던 1990년대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 시절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했기에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2004년에 막상 도달해 보니 그 아름답게 기억만 되는 사랑이
현실보다 클 수 없었다.
아마도 그 또한 나와 비슷했으리라.
5.
나는 그의 결혼 소식을 들으며
잘 살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그와 다시 사랑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어쩐지 공허한 느낌은 지울 길 없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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