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의 설날 (2005-02-09)

작성자  
   achor ( Hit: 600 Vote: 5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설날을 맞이하여 부모님 집을 찾았다.
이번 설은 정말 이례적으로 부모님조차 시골집을 가지 않았다.
부모님과 나, 셋이 모여 조촐한 설을 맞이했다.



2.
제사를 지내기 직전,
나는 거실에서 TV를 보며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TV에서는 용서,라는 제목의 KBS 아침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때 호감을 갖고 있던 정선경이 부인이고, 그 남편은 정보석이다.
아마도 정보석이 바람을 피다 걸린 상황이었나 보다.

정보석은 용서를 빌고 있었고,
정선경은 이해를 해주고 있었다.

그 씬은 오묘하게도 나 또한 언젠가 결혼을 하고 난 후
바람을 피고, 그리곤 내 부인한테 이해를 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하였다.

뭐랄까 부인에게 가장 미안하고, 가정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그런 사건 속에서
상대방과의 진심 어린 교감으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교감이 실패하여 가정이 파탄되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니
결국은 나는 내 부인이 아주 이해심 많기를 바라는 것인가 보다.

물론 내 부인이 바람을 피웠을 때 나는 과연 넓은 아량과 깊은 사랑으로 이해해 줄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만. --;



3.
평소 잘 못 보던 가족이 다 모이는 명절은
잘 나가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는 설문조사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누구는 어느 대학에 들어갔다더라, 누구는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더라 등등의
~더라의 이야기로 비교당하는 그 기분이 싫다는 것이었다.

내겐 나와 동갑인 사촌 남자아이가 한 명 있는데
그가 얼마 전 MBC의 PD가 되었기에 나는 그와 비교당했다. ㅠ.ㅠ

사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방송사 PD 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학과 친구 중 SBS PD가 된 친구는 학교에 플래카드가 걸릴 정도였고,
고등학교 친구들 중 방송국 입사 준비를 하던 이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익히 이야기 들은 바 있었다.

그러니 고등학생 때 각종 문제를 일으키다 어느 이름도 못 들어본 지방대학교에 들어갔던 내 사촌이
MBC PD가 되었다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던 게다.

물론 많은 이들이 초등학생 때는 착하고 성실하며, 게다가 공부까지 잘했던 것처럼
내 사촌 또한 초등학생 때는 반장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게다가 역시 부모님이나 선생님 말씀대로 친구를 잘못 만나
중고등학생 시절엔 좀 삐뚤어져서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케이스였다.

같은 남자 아이였던 데다가 사는 곳도 근처였고,
게다가 사촌이라는 혈연으로 굳게 뭉쳐있던 나와 그 사촌은
어렸을 때는 아주 친했지만
스무 살 내 독립 이후에는 별로 만나지 못했었다.

알고 보니 그 사촌,
대학에 들어온 이후 각고의 노력을 했나 보다.

그 어느 무명의 지방대에 겨우 입학한 이후
군대를 바로 다녀왔고, 그리곤 1-2차례의 편입을 통하여 결국 괜찮은 대학으로 졸업을 했다고 한다.
그 이후엔 돈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지금의 문화 속에서 서울의 한 대학원 신방과에 입학하였고,
결국 MBC의 PD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놀랍고, 신비하며 아직까지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사실이니 믿을 수밖에...
새삼 내 사촌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정말이지 나는 그 사촌과 내가 비교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 사촌이 잘 되었다는 데에 축하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은 이미 과거에 충분히 많이 겪어왔다.
이제는 경쟁, 그것을 내 사전에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은근히 그 사촌은 그런데 너는 뭐냐,라는 뉘앙스로 내게 이야기 한다 해도
내가 아무렇지 않으니 상관 없는 일이다.
부끄럽거나 쪽팔리지 않고, 투쟁심이나 분노가 생기지도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희노애락에 자유로워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는 내 학창시절의 바램대로
나는 도인이 되어가나 보다. --;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334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diary/999
Trackback: https://achor.net/tb/diary/999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버튼 LINE it!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Name
Password
Comment
reCaptcha



Tag

번호
분류
제목
작성일
조회수
추천
807개인 화산고 [1]2005/06/1038306
806개인 또다른 문화2005/06/09741918
805개인 박주영 [1]2005/05/23480215
804개인 술 마시지 않는 자들에게 고하노니,2005/05/1034918
803개인 감기 [3]2005/05/0924223
802개인 가능하냐? [1]2005/05/06717014
801개인 지난 며칠동안... [1]2005/05/0574419
800개인 4월은...2005/04/29949820
799개인 힘주어 말하자면,2005/04/29511518
798개인 S다이어리2005/04/26437922
797개인 남가좌동 2 [1]2005/04/20538827
796개인 100만원의 가치 [3]2005/04/17719246
795개인 봄비 내리던 일요일 아침2005/04/11800328
794개인 유시민의 첫 발을 주목하다2005/04/04638233
793개인 3월의 일요일 오후, 대학로에서... [1]2005/03/28466824
792개인 내가 배우지 못한 우리의 역사가... [1]2005/03/28228917
791개인 0323 노대통령의 연설을 환영하며...2005/03/24601421
790개인 얼어 죽어가며...2005/03/22606522
789개인 2005년의 설날2005/02/1015295
788개인 게으름에 대한 잡념2005/02/0819133
H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T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3/04/2025 12:32:03